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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사림과 붕당정치

유로지아 2015. 11. 2. 05:42

(퍼온글) 사림과 붕당정치


 

 

 

 

 

사림의 정치적 성장부터 확인해보도록 할텐데요.

기억나시나요? 조선을 건국했던 그 주도세력들 그들은 관학파였고 이후에 훈구파로 연결이 되었고 훈구파와 훈구파를 공격하면서 조선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향촌으로 냑향했던 그들 바로 사림이였죠! 

 

사림의 정치적 성장을 그래프로 도식화 시켜서 확인을 해보면

훈구가 공격하는 상황에서 훈구가 4번의 위기를 맞다가 쭉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훈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세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훈구의 특징 

15세기 때 훈구의 경제적 기반은 대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세력들이였습니다. 

 

사림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초기에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 중앙을 들어오면서 3사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훈구의 비리들을 비판하면서 압박해 들어옵니다. 그러자 훈구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겠죠 그래서 사화를 통해서 

사림들을 압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 사림의 특징

사림은 중소지주 출신이였고, 향촌 자치를 지향하는 조선 건국에 침여하지 않고 향촌으로 냑향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사림들이 향촌으로 냑향해서 세력을 키울 때 공급원, 영양소는 유향소, 서원, 향약 이런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키웠습니다. 

유향소는 여론을 장학하고 서원에서는 인물들을 끊임없이 키워냈고, 향약에서는 농민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 4대 사화 

1. 무오사화

-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입니다. 무오사화 때 일어난 왕은 연산군 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실록이 없고 일기만 있습니다. 왜 실록이 아니나면 연산군이 폐위가 되었기 때문에.. 연산군 일기라고 합니다. 폭정의 대명사였죠~!! 

 

일어나게 된 원인 

무오사화의 원인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서 일어납니다. 연산군 때 선왕인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국을 열었는데, 이 때 당시 사관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견되었고 조의제문은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에 비유하여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弔義帝文 (조의제문): ‘조(조의를 표하다)’ ‘의제(회왕)’ ‘문(글)’ 을 이야기합니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결과 

이에 훈구 세력들은 연산군을 꾀어 김일손 등 그 일파를 죽이거나 귀양보내었고 김종직을 부관 참시하였습니다. 이극돈·유순·윤효손·어세겸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구요.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2. 갑자사화

-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문제로 훈구와 사림들이 다같이 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 비 윤씨는 질투와 투기로 왕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다가 폐비된 후 사약을 받았죠. ‘금삼의 피’라는 소설로도 유명한 이 사건은 훗날 임금이 된 그녀의 아들 연산군을 자극, 대규모 사화를 유발했습니다.

 

갑자사화는 다른 사화하고 성격이 약간 다른데요. 무오사화의 성격이 왕과 훈구 세력이 사림을 공격하는 형태로 띠고 있다면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났습니다. 이후에 부모가 죽은 계기를 통해서 

왕이 훈구와 사림을 동시에 때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연산군은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서 폐위가 됩니다.

 

갑자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이 아니라 연산군의 전략적인 보복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훈구파는 사림파와 마찬가지로 연산군의 절대왕권에 압도된 상태였고, 이들은 그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춰주며 

정권을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갑자사화의 배경 자체가 폐비 윤씨를 쫓아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라는 면에서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주체적으로 일으킨 것이죠.

 

3, 기묘사화 

-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이고 조광조의 개혁이 문제가 되면서 일어난 사화입니다. 

 

원인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귀양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김정과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살, 김구, 박세희, 박훈 등은 귀양을 갔는데 모두 30대의 청년이었고, 또 그들을 옹호하던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와 김세필은 파면되었습니다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습니다. 이 옥사가 기묘년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이라 하였습니다.

 

※ 조광조의 개혁

1) 위훈삭제

- 위훈삭제는 중종반정을 계기로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사림파)는 새로운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훈구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정국공신의 수가 너무 많음을 지적하면서 성희안(成希顔)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공신이 되었고, 유자광은 친척들의 권세를 위해 반정에 참여했는데 이는 소인들의 반정정신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따라서 반정공신 2, 3등 중 심한 것을 개정하고, 4등 50여 명은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죠. 

 

2) 현량과

- 현량과는 시험을 통한 선발제인 과거제에 추천제를 결합시킨 것으로, 1519년(중종 14년)에 조광조의 건의로 실시되었습니다.

사림과 성균과의 유생들을 정치에 참여시키키 위한 추전제였죠.

 

3) 소격서 페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어지럽히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소격서는 혁파되어야 한다'고 정암 조광조가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을 현혹시켜 돈을 뜯어내는 가짜 도사들이 판을 치고 자신들이 따르는 왕실에서 이단인 도교를 믿고

도교의 의식을 행하는 소격서에 참배하고 또 왕실 사람들이 은밀히 도교에서 내려온 미신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조광조를 위시한 유학자들에겐 참을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이리하여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죠.

 

4) 소학 보급

조광조는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는데요.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5) 방납의 폐단을 지적

조선시대 상인 관원이 끼어들어 백성 대신 공물을 대납해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왜 대신에 납부해 주어야 했냐면 예를 하나 들어서 제주도의 특산물은 감귤인데 오이를 진상하려는 공납을 조정에서 지시하면 백성이 마련할 도리가 없으니 그 사이에서 끼어들어 오이를 대신 구해는 방납이라던지, 조정에서 옳은 공납요구를 하더라도 중간에 삥땅을 친다던지.. 수작질을 부려 백성을 힘들게 하는거죠.. 이런 부분을 조광조가 방납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4. 을사사화 

- 을사사화는 명종 때 벌어지는 사건인데요.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을사사화 배경으로는  중종이 제1계비(새 장가를 들어 첫번째 얻은 부인)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는데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이며, 장경왕후의 아우에 윤임이 있었고 문정왕후의 아우에 윤형원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죽이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죽였습니다.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다음은 사림의 계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림의 계보는 정몽주부터 시작을 해서 정몽주 밑에 길재 -> 김숙자 -> 김종직으로 이어지고 있구요. 

김종직의 뒤를 있는 계보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에 또 뒤를 잇는 계보로 이언적, 서경덕, 조광고, 김안국이 있구요. 또 그 뒤를 이어서 

조식, 이황, 이이, 성혼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대결구도에 있었던 인물이였고 김종직과 김일손은 무오사화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경덕, 조식, 이황의 영향을 받은 세력들이 이후에 동인당을 형성하고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은 세력들이 서인당을 형성합니다. 동인당과 서인당이 나뉘어지는 이유는 척신청산 척신들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있어가지고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분화가 됩니다. 

동인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척신에 대한 청산에 있어서 굉장히 강경한 세력들이고 서인은 상당히 온건한 세력들입니다. 

 

척신청산에 대해서 동인당은 '뭘 어떻게 다 쓸어버렷!' 

서인당은 '정치가 그런게 아니지 한솥밥 먹고 같이 해왔던 사람들끼리 그럴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의견이 갈리면서 붕당정치가 출발하게 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중에는 다시 조식과 서경덕에 영향을 북인 이황에 영향을 남인 이이에 영향을 받은 노론 성혼의 영향을 받은 소론 이렇게 

더 세분적으로 분화가 됩니다. 이러면서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모습이 형성이 되는 것이죠. 조선을 건국했던 관학파를 계승했던 

훈구 세력들이 결국은 자신의 집권을 남용하면서 비판을 받게 되고 그 비판 주체 세력들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게 되는 그러면서 붕당정치를 열게 되는 16세기의 모습으로 이제 들어가고 있는 흐름을 기억하고 있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이 포스팅과 관련된 자료들을 몇개 올리면서 이번 포스팅을 마치도록 할께요!!

 

 

1. 사림의 등장

무릇 창업한 군주는 성공에 뜻을 두고 보잘 것 없는 재주와 기술이 있더라도 모두 수용하나, 수성의 군주는 이와 달라 재덕의 겸비를 따져본 연휴에 등용합니다. 세조 때는 보잘 것 없는 재주와 기술이 있는 자라도 장단점을 헤아려 임용한 안연으로 공을 얻어 훈신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훈구라고 모두 채용하니, 채용된 자가 모두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현명하지 못한 자가 죄를 범하여 벌을 주면 은혜를 상실하게 되고, 죄를 주지 않으면 법에 패하게 됩니다. …… 훈신을 서용하지 않으면 공신을 보전하게 되고 은혜를 상하지 않고 법도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 성종실록 - 

 

 

2. 현량과 

지난번 조광조가 아뤈 바 천거로 인재를 뽑은 일은 여럿이 의논한 일입니다. 각별이 천거하는 것은 한의 현량과와 효렴과를 따르는 것이 가합니다. …… 혹 뒤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고, 혹 공평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대체로 좋은 일이니 비록 한 두 사람이 천거에 빠진다 하더라도 주저할 것 없이 시행해야 합니다.…… 어찌 한 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좋은 일을 폐지하겠습니까? 

- 중종실록 - 


*원문 출처: http://blog.naver.com/seungp916/60200966787